* * * “하아…….”깊이, 깊이, 깊이 한숨을 쉰 티노는 들고 있는 나무통 안의 원석을 세척기에 쏟아 부었다.“하아…….”그리고 다시 깊이 한숨을 쉬며 계단 아래의 저편을 돌아봤다. 요 며칠 동안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시문이 나무 의자에 발을 꼬고 앉아서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말없이, 묵묵히, 뚫어져라.“저 원석 안 빼돌리거든요? 감시하실 필요 없다고요.”“빼돌려 봐야 팔 데도 없습니다.”“그럼 대체 왜 만날 와서 보시는 겁니까? 제가 뭐 대단한 거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재미있어서 그럽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신경 쓰인다고, 이 사람아! 티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계단을 내려왔
2019-07-15
“왜 안 하는 거야? 디나르 가라면 정말 명망 있는 곳이라고! 거긴 사병 대우도 좋단 말이야. 급료도 네가 지금 받고 있는 거에 몇 배는 더 받을 걸?”“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다니까요.”“원석 가공 쪽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벌써 예전에 한 번 오간 문답인데도 그는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티노가 사병이 된다고 그에게 뭐가 떨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시문 님의 공방에서 일하는 걸로도 충분해요.”티노는 씩 웃고 수레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아직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오라를 모락모락 피우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냉큼 출발했다. 저런 식으로 티노에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몇 명
테이슨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티노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봤다. 거기엔 시문의 공방밖에 없었다. 덩달아 그 시선을 좇은 티노는 퍼뜩 깨닫고 테이슨을 홱 돌아봤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작게 물었다.“이곳인 거예요?”“후우……. 우리가 배후라 심증을 굳히고 있는 자가 바로 시문 님의 아버지란다.”“시문 님이 귀족이었어요?”귀족이란 분이 왜 원석 가공을 하고 있답니까, 라는 질문은 삼켰지만 그 속을 모를 테이슨이 아니었다.“시문 님은 어려서부터 괴짜라 소문이 자자한 분이라……. 집안에서도 포기했달까?”“……저도 그런 친구를 알고 있지요.”티노는 플로레스라면서 기계공학에 심취해 있는 괴짜 친구를 떠올리면서 납득
정제된 원석을 쓰면 시간이 절약되겠지만 그것을 세척실에 남겨 둘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창고를 오가면 들킬 위험이 커진다. 창고를 가는 것은 소량의 씨드를 쪽쪽 뽑아낸 원석을 갖다 놓을 때 한 번으로 충분하다. 거기다 일반 원석을 쓰면 세척하는 김에 사적인 작업을 조금 섞은 것뿐이라는 자기정당화도 할 수 있다.세척기 안을 집중하여 바라보던 티노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세척기 옆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끝에 그물망이 달린 막대기로 안을 헤집으면서 완벽하게 활성화된 것을 골라내어 나무통에 도로 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건져 내다가 드디어 세척기 안이 다 비었을 때 망을 내려놓았다.그렇게 건져 낸 원석, 아니
테이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성실한 어조로 제안했다.“내가 학생 때 배웠던 책이 서재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걸 가져다주마. 시간을 내어 가르쳐 줄 테니 모르는 것은 체크해 두렴. 자주 시간 내긴 힘들겠지만 아예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거다.”“그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많이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티노는 놀란 얼굴로 테이슨을 보았지만 생각도, 고민도, 사양도 안 했다. 넉살 좋은 그 모습에 테이슨은 피식 웃었다. 원석을 보관하는 창고는 겉보기엔 작은 일 층짜리 건물이지만 들어가면 지하로 삼사 층 높이가량 깊고 넓게 파여 있다. 수거해 온 원석을 붓는 건 일 층에서 하
그때 남자가 움찔하며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경계했다. 어느 틈엔가 뒤에도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다.“넌 포위됐다! 포기하고 아이를 놓아줘라!”“흥! 꼬마의 목숨이 걱정되면 너희부터 물러나!”남자는 목청 크게 협박하면서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아까 티노가 보고 있던 좁은 골목길 쪽이었다. 병사들도 그걸 알아차리고 간격을 유지하며 다가왔다. 이대로 가면 끝이 없을 것 같다.티노는 남자의 팔뚝에 매달려 호흡을 확보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살아남는 법’에 가까웠던 아르카의 훈련 덕에 그는 어느 순간이든 머리 한쪽은 냉정하게 계산할 줄 알았다. 왜 그는 티노를 인질로 삼았을까? 처음엔 분명 그냥 도망가려 했었다.
“수업료가 너무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직 급료도 안 정해졌고.”“그러게. 보름은 두고 본다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얼마 안 남았잖아. 티노는 정말 부지런하게 잘 하니까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시문 님은 인색하지 않으시거든.”시문에 대해서라면 이성을 살짝 잃어버리는 라디라서 믿음은 안 갔다. 게다가 여태껏 시문이 공방을 둘러보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체 뭘 어떻게 보고 판단해서 티노의 급료를 정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문의 열렬한 팬인 라디에게 그 의문을 털어놓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웨이 선배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다른 공방이었으면 쫓겨나도 한참 전에 쫓겨났을 걸?”라디는
원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특수한 용기에 여러 시약을 넣어 끓인다. 불로 가열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이어져 있는 어스듐 라인에 어스듐을 연결하여 천천히 가열한다. 한 번 끓이면 그 온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어 어스듐만 제때 보충하면 다시 작업할 필요는 없다.먼저 계속 가열 상태인 시약의 양을 확인하여 보충한 뒤에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는 원석을 넣어 둔다. 불순물이 깨끗이 떨어지면 원석을 건져 내어 시약을 닦아 낸다. 그 시약은 인체에 무해하기에 깨끗한 천으로 한 번 닦아 주기만 해도 된다.특수 용기 옆에는 코어를 축출한 뒤 압축하여 캡슐에 담는 장비도 갖춰져 있지만 현재는 그걸 다룰 수 있는 코어 기술자가 없어서 방치
끼어들 틈 없이 이뤄지는 문답에 테이슨은 안절부절못했다.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니 말조심하라고 충고한 것이 얼마 전이건만 무슨 배짱으로 저리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시문은 좀 전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결국 갈 곳이 없어서 여기에 왔단 소리군요? 이쪽 일엔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예! 전 친위대에 들어가는 게 꿈이거든요.”이 화제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이 없는 티노는 거침없이 답했다. 그러는 한편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앞서 말했듯이 먹고 살아야 꿈도 꿀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꾀부릴 생각은 없어요! 시
티노는 어깨를 슬쩍 으쓱여 보였다. 테이슨은 풋 웃어 버렸다.“그런데 깨나 태평하구나?”“태평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돈이 없으면 일하면 되는 거죠. 이렇게 큰 도시에 저 하나 일할 곳 없겠어요?”“하하! 네 말이 맞다. 이 배짱 좋은 녀석!”크게 웃음을 터뜨린 테이슨은 호의 깃든 눈으로 티노를 내려다보았다.“난 지금 막 널 봤을 뿐이지만 어쩐지 어디다 던져 놔도 잘 살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그런 말을 많이 들어 보긴 했죠.”“하하! 그러니 기초 군사 훈련을 막 끝냈을 뿐인 녀석을 혼자 수도에 보냈겠지. 너뿐만 아니라 네 부모님들도 배짱이 두둑한 모양이다.”“할아버지가 지나치게 대담하긴 하시죠.”티노가 대수롭
“소속이라니?”사관학교 입학에 대해 국가가 발행한 책자를 꼼꼼히 읽고 준비했었음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책자에 써져 있는 바에 의하면 사관학교 입학 조건은 왕과 왕가에 대한 충성, 무예에 대한 자질, 명예를 아는 품성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소속’에 대한 건 없었다.그러니 티노의 질문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으나 갈색머리 소년은 과장되게 놀라는 척하며 되물었다.“여기에 입학할 거라면서 그것도 몰라?”“내가 본 책자엔 그런 말은 없었어.”“뭘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딱 넷뿐이다. 자질이 뛰어난 귀족 신분의 사람, 기부금을 낼 수 있는 부유한 사람, 친위대원을 부모로
“다녀왔습니다!”“저녁은?”“아직요.”티노는 무기들을 제 방, 제 자리에 넣은 뒤에야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램이 치우고 있는 보존식품을 보고 피식 웃고는 곧장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곱게 빻은 곡물과 우유, 버터 등으로 만든 스프와 건과일을 넣어 구운 팬케이크, 얇게 썬 훈제 햄과 신선한 과일 샐러드 등으로 식탁은 금세 풍성해졌다.“어딜 다녀오는 길이냐?”“여기저기요.”“내일부터는 공방에 출근해라. 이제 성인이니 본격적으로 배워야지.”“언제는 본격적이 아니었나?”“그동안은 마음껏 뛰놀게 해 줬잖느냐?”“뭐가 마음껏이에요? 숙제랑 일이랑 끝내지 않으면 잠도 못 자게 했으면서.”티노는 사실을 지적하며 코웃
2018-06-27
그제야 티노를 돌아본 아르카는 티노의 등에 메여 있는 커다란 기계 팔을 발견하고 눈을 번뜩였다. 공들여 닦고 있던 기계 부품을 살포시 작업대에 내려놓고, 커다란 작업대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티노가 고정한 끈을 풀어, 연적의 손에서 연인을 뺏어 오는 양 기계 팔을 앗아 가는 데 걸린 시간은 말 그대로 눈 한 번 깜짝일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이리 나올 줄 알고 있었음에도 티노는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아르카를 바라보았다.“이봐? 공짜는 싫다며?”“선물은 다르지.”당연하다는 투로 답하는 아르카의 태도는 평소처럼 딱딱하면서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기계 팔을 뜯어보는 눈은 흥분과 호기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마키에이프의 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가?”“친위대!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어!”단순하리만치 즉각 반응하며 티노는 두 눈을 과하게 반짝였다. 아이들에겐 공감을, 어른들에겐 비웃음을, 할아버지한테는 호통을 사는 티노의 야망이었다.“넌 스플래쉬 아일의 노블리…… 사람이지?”“응.”“그곳 노블…… 사람들은 전쟁이나 싸움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뭐, 그렇지.”티노는 어깨를 으쓱였다.“나도 딱히 전쟁이나 싸움이 좋은 건 아니야. 친위대원이 되고 싶은 거지.”“친위대에 들어가면 전쟁은 물론 정치 싸움에도 휘말릴 거다. 무기 제작 쪽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건가? 정말 하기 싫다면 강제로 시켜도 안 하면 그만이었을 거다. 소질이 있
“그래?”남자의 음성은 전과 똑같았지만 묘하게도 그가 웃는 것처럼 들렸다. 당한 것 같단 느낌이 든 건 두통이 잦아든 뒤였다.“폭탄은 포기하지. 대신 네가 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미리 말해 두지만, 난 폭탄에 대한 어떤 것도 말 안 할 거야.”“당연히 그러겠지.”티노는 비장하게 말했건만 남자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인정했다.“네가 가르쳐 주길 바라는 게 아니야. 뭔가를 해 줬으면 하는 거지. 보고 못하겠으면 포기해도 된다.”“보고 결정하겠어.”자존심을 긁는 발언이었지만 무기 제작 장인인 램의 손에서 큰 티노는 기밀 유출에 대해서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옹알이를 시작했을 때부터 비밀을 지키는 법을 배워 왔다.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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