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동해의 용(3)이미 대광의 몸 구석구석까지 독이 퍼져 있었다.이슬휘가 가진 현대 의학 지식을 아무리 동원한다고 해도 대광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대광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이걸 대왕께 전해드리면 당신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실 것이오.”대광은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죽통을 제대로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이슬휘는 끝까지 그를 안심시켜 주었고 다행히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슬휘는 그를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이슬휘는 마차에서 말을 분리한 후 말을 타고 경주를 향해 달려갔다.***대광에게서 받은 옥 노리개 조각을 전해 주자 잠시 후 시종이 나와 이슬휘를 인도했다
2018-09-28
8화동해의 용(2)대광은 새벽빛이 뿌옇게 밝아오자 포구로 향했다.그때였다.“저기다!”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소란해졌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달려와 대광을 둘러쌌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칼이 들려 있었다.대광은 그들을 둘러보았다.모두 다섯 명.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검술의 고수들 같았다.그렇지만 감히 자기를 상대하는데 다섯 명밖에 동원하지 않았다니,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그래,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인단 말이지?’대광은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대광이 칼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가자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이 칼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띠었다.어느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
7화동해의 용(1)늦은 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방 안에서 두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상석에 앉은 남자는 비록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다부진 풍채에 상대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앞에 놓여 있는 주안상에서 잔을 들어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꺼냈다.“그래, 자네 몸은 좀 어떤가? 먼 길 다녀왔는데 쉴 틈도 안 주고 이리 오라 해서 미안하네.”“아니옵니다. 돌아왔으니 당연히 제일 먼저 폐하께 보고를 올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앞에 앉은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내는 깡마른 몸매에 얼굴에 피곤함이 쌓여 있었지만 눈매만큼은 상석의 남자 못지않게
6화행복한 남자(3)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이 기대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나갈 채비를 꾸리고 있었다.“형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지요.”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봉림 대군이 세자에게 말했다.둘은 옆방으로 들어갔지만 말소리는 밖으로 다 들려 나왔다.“형님, 여진족 오랑캐들과 가까이 지내시는 것도 모자라 근본도 알 수 없는 색목인과도 친교를 맺으려 하십니까?”화난 봉림 대군의 말소리에 이어 세자의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어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우리 조선에 돌아갈 때 하나라도 더 배워 가려고 이러는 게 아니냐?”“그래 봤자 오랑캐들의 천박한 풍습인데 배우긴 뭘 배웁니까?”“너는 이들이 어떻게
5화행복한 남자(2)이슬휘가 이렇게 바뀐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 때문이었다.예전의 그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었다. 그저 버그가 발생한 시점으로 돌아가서 앞뒤 가리고 잴 것 없이 버그만 제거하고 오면 끝이었다.그런데 그녀를 만난 후부터는 버그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사건까지 미리 다 훑어본 후에야 그 시점으로 들어갔다.뭐랄까, 인간에게 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이건 찻집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던 기분과는 다른 것이었다.찻집에 앉아 구경할 때는 그 사람의 표정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현재의 현상을 관찰한 것이라면, 지금은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었
4화행복한 남자(1)“세자 저하,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옵소서.”강빈이 세자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세자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이렇게 답답한 것은 방금 전까지 아우인 봉림 대군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까닭이었다.지난 8년 동안 청국의 심장부에서 이 나라의 성장을 지켜봐 놓고도 고작 생각하는 게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안타까웠다.세자는 여진족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청에 볼모로 잡혀와 지내는 동안 청의 국력과 성장을 보며 자기의 생각을 싹 고쳐먹었다.게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명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경까지 점령하지 않았느냐
3화소녀를 만나다(2)우우웅.탐지기가 진동을 했다.도서관이었다. 이슬휘는 보던 책을 덮고 탐지기를 확인했다.―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 한양 경복궁.슬휘는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졌다. 이날은 그녀가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날이었다.그런데 무슨 일이?슬휘는 얼른 탐지기를 조작해 아카식레코드의 기록을 살폈다.정상적인 역사에서는 그녀가 죽어야 하는데 그녀가 죽지 않고 피신하는 버그가 발생한 것이었다.같은 사람에게 두 번의 버그가 발생하는 것은 그의 임무 중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쩌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발생한 버그일지도 몰랐다.그런데 그 결과가 하필이면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나는
2화소녀를 만나다(1) 1865년 8월, 조선 경기도.그는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로 왔다. 소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소녀는 나중에 이 나라의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그는 현장에 도착해 탐지기를 통해 아카식레코드의 정보를 살펴봤다.산에서 길을 잃게 되는 단순한 사고였다. 그는 현장을 둘러보며 어떻게 오류를 바로잡을지 계획을 세운 다음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다음 날 그는 여주로 가서 소녀의 집 근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종일 그 소녀를 관찰했다.소녀는 성격이 활달한 것 같았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강단도 있어 보였다. 이야기로만 만나던 역사적 인물을
1화.PHC-E3 그의 공식 명칭은 ‘PHC-E3’로 행성역사위원회(Planet History Committee) 소속이었다.그는 자기 이름의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E’는 지구를 말하는 것일 테고, ‘3’은 그가 세 번째 임무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숫자이리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또한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이 지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전임자들은 누구이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억과 정보만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을 뿐이었다.그의 임무는 지구의 역사가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즉 그는 지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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