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나가 풀이 죽은 세실리아를 달래서 근처의 바(bar)로 향했다. 차양 아래 놓인 나무 의자에 앉은 그녀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그런데 너도 문제의 공고를 보러 왔니?”“공고라니요?”“어떤 미친 녀석이 공고에 장난을 쳤지 뭐니? 공고를 올리는 값이 적지 않은데 아마 돈이 썩어 나는 녀석이 미친 척하고 올린 것 같아.”상심을 어느 정도 털어 버린 세실리아가 방긋 웃으며 되물었다.“무슨 내용인데 그래요?”“나도 소문을 듣고 가 봤는데 황당하기 그지없더라. 너도 알지? 모험가가 노려서는 안 되는 몬스터 순위 중 아홉 번째에 오른 아펜디아 분지의 네임드 몬스터 카누바라크 말이야.”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세실
2019-07-15
“사제의 해독 마법조차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네. 결국 카누바라크에는 사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딱지가 붙어 버렸지. 그러니 갑옷은 포기하도록 하게. 금속제 판금갑옷도 나름대로 쓸 만할 거야.”그러나 카르고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잡아 오겠습니다. 그러면 갑옷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스트라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허허.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게. 아케니아 혈족 유일의 전사라면 우선 몸을 사려야 하지 않겠나? 전사의 혈통을 이어 나가려면 말일세.”“잡아 올 자신이 있습니다.”말을 마친 카르고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스트라비가 계속해서 만류했지만 카르고는 좀처럼 고
“물론 내가 만들었지. 그나저나 아만족 말은 정말 어렵군. 우리가 아닌 다른 종족들이 배우려면 상당히 고생하겠어.”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카르고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통역을 통하는 것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카르고의 입장에서 모든 종족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포포리 장인을 만난 것은 천운일 수밖에 없었다.“상당한 솜씨입니다. 겉부터 속까지 한결같은 성질의 강철로 단련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죠.”상당한 솜씨란 말에 눈매가 급격히 휘말려 올라갔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은 포포리족이 담배를 바닥에 문질러 껐다.“뭘 좀 아는 친구로군. 그러나 상당한 솜씨라는 말은 과했어.”“이 검을
주먹의 마디를 꺾으며 나서는 카르고를 본 세실리아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카르고는 강력한 몬스터인 리퍼조차도 맨손으로 때려잡은 전사이다. 현실적으로 질 나쁜 건달패거리들을 당해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혹시 저들을 죽일 생각은 아니겠죠?”“마땅히 죽여야지. 다른 이의 재화를 노리는 것 자체가 죽을죄이지 않겠어?”기가 막힌 세실리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그러면 안 돼요!”“어째서 안 된다는 거지?”“인간에게는 인간 나름대로의 법이 있어요. 일단 발키온 연합의 일원이 된 이상 카르고 님도 법규를 지켜야 해요. 도시 안에서 살인을 하는 것은 명백히 법규 위반이에
‘어찌 이런 일이……. 아만 일맥 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아케니아 혈족이었는데.’아케니아 혈족은 얼음 거인의 공세에 최후까지 맞선 혈족이었다. 비록 얼음 산맥이라는 천연의 방어막 덕을 보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은 아만족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귓전으로 세실리아의 들뜬 음성이 파고들었다.“아만족 전사는 모두 카르고 님처럼 강한가요?”카르고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알 수 없다. 우리는 아만족의 일맥인 아케니아 혈족이다. 그리고 아케니아 혈족에서는 내가 유일한 전사다. 나 외에 다른 아케니아 혈족의 전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그 음성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여 세실리아가 조용히 입
“먹고 자는 데 네 손에 있는 돈이란 물건이 필요한 것인가?”그 말을 들은 세실리아는 마침내 눈앞의 덩치 큰 아만족 전사를 요리할 방법을 알아차렸다. 그는 싸움만 잘할 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당연하죠.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뭘 하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해요. 저라면 죽은 자들의 장비와 배낭을 모두 가지고 갈 거예요. 가지고 가서 적절한 곳에다 팔면 돈으로 바꿀 수 있어요. 돈이 있다면 전사님의 몸에 맞는 갑옷과 무기를 구매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흠, 제 말대로 하셔도 문제가 생기겠군요. 레나르에 아만족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 외에 거의 없어요. 물건을
손을 털며 몸을 일으키는 카르고에게로 미하엘과 발락이 조심스럽게 접근해 들어갔다. 입을 다문 도미니크는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궁수인 폴은 이미 시위 가득 화살을 메긴 상태였다.“저항할 생각인가?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싶군.”“어느 누구도!”카르고의 입술이 벌어지며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우리 아만족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말을 마친 카르고의 몸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였기에 미하엘이 흠칫 놀랐다.그들의 상식으로 아만족은 힘만 좋을 뿐 움직임 자체는 굼뜬 종족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가 몸을 날리는 속도는 숙련된 전사보다도 오히려 더 빨랐다.카르고가 덮쳐 가는 방
미하엘의 추측대로 발락은 나무에 묶인 소녀에게 시선도 두지 않았다. 노예 사냥꾼이 되고 난 뒤의 수입은 과거 파티를 이끌고 몬스터 사냥을 할 때나 상단에 고용된 용병으로 받는 수입에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그래. 임무를 마치면 주머니가 두둑해질 테니 딴 데 눈 돌릴 이유가 없지.’ 나무에 묶인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어제 목격한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이 아직까지 그녀를 공황상태에 빠트리고 있었다.소녀의 이름은 세실리아, 이제 갓 마법에 입문한 풋내기 마법사였다. 모험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 지금 같은 꼴을 겪을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세실리아는 어릴 때부터 마법에 자질을
2018-06-27
카르고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무기도 없으니 말이야. 레나르로 가는 길에 드문 확률로 리퍼가 출현한다는 보고를 받았어. 일전에도 리퍼의 습격으로 수송마차에 타고 있던 병사 다섯 명과 아만족 두 명이 죽었는데 말이야.”“뭐 어쩔 수 없잖아. 이곳에는 더 이상 수송마차가 오지 않으니 어쩌겠어? 뭐 리퍼가 나타난다고 해도 다 자기 운이 나쁜 것이겠지만 말이야.”리퍼는 몸길이만 6미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 앞발에 달린 날카로운 낫은 기사의 판금갑옷마저도 갈가리 찢어 버린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말살하려는 본능을 지닌 리퍼는 여행자에겐 악몽 그 자체
번쩍.바로 앞에서 안광을 접한 파야곤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전사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파야곤이 본 것은 선명한 붉은 눈빛이었다. 통상적으로 회백색이나 연초록색인 아케니아 혈족의 눈동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눈빛이었다.마치 적응하려는 듯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이던 전사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맺혔다. 붉게 빛나는 눈빛이 파야곤에게로 쏟아졌다.“너는 누구지?”착 가라앉은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굵직한 음성에는 힘과 자신감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파야곤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아케니아 혈족의 마지막 전사를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머나먼 후손이 선조를 뵙
제사장 회의에서 결론이 도출되자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발키온 연합은 아케니아 혈족에게 비아아우레움 가드 인근의 넓고 풍요로운 땅을 이주지로 제공했다. 아케니아 혈족 전체가 그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되었다.발키온 연합에서는 많은 호위 병력과 수송수단을 제공해서 아케니아 혈족의 이주를 도왔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아케니아 혈족들이 수송용 마차에 타고 새로운 이주지로 이동했다.험준한 얼음산에서 거주하던 아케니아 혈족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아케니아 혈족들이 오랫동안 광석을 채굴하던 광산은 텅 비어 버렸고 마을은 도무지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다행히 발키온 연합에서 제공한 땅은 그들
제1장발키온 연합, 아케니아 혈족을 발견하다얼음에 덮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감히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험준한 절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태곳적에 생성되어 한 번도 녹지 않은 만년설이 대지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피조물의 발길을 거부하는 험준한 지형 사이로 멀리서 보면 마치 실지렁이처럼 보이는 좁은 소로(小路)가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조심스럽게 지나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선두에 선 자들은 잘 제련된 금속 갑옷을 입고 말에 탄 기사들이었다. 은백색 투구 아래 안면을 보호하는 바이저 아래로 무성한 수염과 굳게 다문 입술이 자리했다. 그들이 든 방패에는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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