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노는 눈을 껌벅이며 가볍게 살펴보던 어스듐 라인을 다시 자세히 뜯어보았다. 시문이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무슨 일입니까?”“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자신이 알아차린 것을 시문에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건지 모른 척하는 것이 현명한 건지를 계산하다가 후자 쪽에 손을 들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저 어스듐 라인은 티노에게 있어 친근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그것을 연구하며 이용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시문의 기계 장치에 씨드를 공급하는 어스듐 라인. 시문이 저런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친위대에 들키지 않게 한 어스듐 라인. 그것은 바로 수도 전역에 깔려 있는 도둑 회로였던 것이
2019-07-15
철문 안을 들어서자마자 있는 계단을 내려와 도착한 시문의 작업실은 의외로 평범했다. 두 벽면엔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짜여 있고, 그 책장을 꽉 채우고도 넘쳐 나는 책들이 책장 앞에 티노의 키보다도 높게 몇 겹이나 쌓여 있다. 다른 한쪽 벽의 반은 책장처럼 천장까지 닿는 서랍장이 있고, 나머지 반에는 가로와 세로가 좁고 폭은 깊은 선반이 칸칸이 짜여 있어 그 안에 돌돌 말린 종이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남은 한쪽 벽에는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문짝 외의 벽면엔 스케치인지 낙서인지 모를 것이 휘갈겨져 있는 종이들이 몇 겹이고 포개어 붙어져 있다.작업실의 한가운데에는 넓은 작업대가 몇 개나 붙어 있는데, 그 위엔 빈 공간이 전혀
제게 필요한 것은 섬세한 기술이 아닌 그 눈썰미입니다.”“이해할 수 없어요.”티노는 미심쩍은 눈으로 시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문은 예의 미소 띤 얼굴로 티노의 질문을 기다려 주었다.“저 정도의 눈썰미를 가진 사람은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없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들은 이미 외부에 어느 정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으니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원석 가공 공방이니까요.”“그렇다 해도 신뢰할 수 없는 절 끌어들이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신뢰할 수 없다?”시문은 재미있다는 눈으로 티노를 바라보았다.“무기 제작 장인의 손에서 큰 사람을 신뢰할 수 없을 리가요. 티노 군은 기
그리곤 라디는 개인 사물함처럼 쓰고 있는 서랍장에서 전날부터 밑작업을 하고 있던 원석과 공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티노는 그런 라디를 어이 없이 보았다. 그 시선에 라디는 싸움을 거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왜? 내가 같이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당연하지. 내내 그런 태도인 녀석이 옆에 있으면 제대로 공부가 되겠냐?”티노는 딱 잘라 대답했다. 라디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 날카롭게 물었다.“걸리는 게 그것뿐이야? 정말로?”“너야말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디는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두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전처럼 쏘아붙이듯이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 더 짙은 감정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난 네가
“테이슨 경이 감옥의 조명등을 봐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씨드가 끊겨 버려서 테이슨 경은 왕성으로 가셨고, 전 씨드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습격당해서 기절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플로레스라가 조력자의 도움으로 탈옥했다더군요.”“흠…….”납득할 만한 말이었는지 아니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힐이나 다른 직원들의 기세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웨이의 기세는 더욱 활활 타올랐다.“웃기지 마! 이 배신자 자식!”“예?”그 말만큼은 수긍할 수 없어서 티노는 진심으로 황당해하며 웨이를 바라봤다.“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테이슨 경한테 못 들었나?”“네. 정신이 들자마자 바
테이슨은 크게 언성을 높였다가 두 주먹을 꾹 쥐고 돌아섰다. 그리고 깊이깊이 심호흡을 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테이슨이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이다.”“……!”실망감이 가득 묻어 나오는 테이슨의 태도에 천하의 티노도 말문이 막혔다.“영리한 아이라 생각했다. 대범하고 믿을 수 있는 아이라 생각했어.”“…….”“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공을 세울 욕심에 앞뒤 분간 못 하는 녀석이라곤 생각 못 했다.”테이슨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지만 듣기 껄끄럽다 못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티노로서는 자신의 실력은 물론 모든 상황을 누구보
지하를 내려서자 굳게 닫힌 좁은 철문들이 쭉 늘어져 있는 복도가 나왔다. 그 철문들에는 각기 위아래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좁은 구멍과 식사를 넣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른 때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저 안 어딘가에서 그의 친구가 고문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지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일일이 문을 열어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씨드가 돌아올지 모른다.“……!”초조한 마음에 아르카의 이름을 부를 뻔했던 티노는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경솔하게 굴었다간 아르카도 못 구할 뿐더러 약속도 못 지킨다.티노는 급히 감방 안을 볼 수 있는
감옥에 도착했을 때, 티노는 아직 밝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에 환호성을 삼켰다. 아직은 꺼져선 안 됐다.“좋아, 아직까진 문제가 없는 것 같구나.”티노가 쟀던 시간보다도 빨리 도착한 테이슨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감옥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 뒤를 티노가 조용히 따랐다. 곧 감옥 책임자가 달려와 테이슨을 맞이했다.“아니, 공무로 온 것은 아니네. 하도 잘생겼다는 말이 많기에 다시 한 번 제대로 봐 둘까 싶어서.”“하하! 어제부터 구경차 방문하시는 분이 많군요. 주로 여자 분들이신데 남자 분도 아예 없진 않았죠.”책임자는 슬쩍 윙크를 해 보였다.“여자 분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질투에 휩싸여 오시는 분들이긴 하지
“외출도 잦아졌고 말이야. 얼마 전엔 성벽에서 다친 일반인의 문병까지 갔었다면서?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아는 아이라서.”“그래? 하여간 발도 넓어.”“재미있는 아이야. 알린, 너도 만나면 마음에 들어 할걸?”배짱만 두둑한 시골 꼬마를 떠올리며 테이슨은 피식 웃었다.“난 어린애는 딱 질색이야.”“나이는 어찌 됐든 올해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친 당당한 성인이라고.”“그래도 싫은 건 싫어.”“네 마음에 들 만한 아이인데…….”테이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티노가 그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친위대원과의 접촉은 피하는 게 좋겠지.스무 살 이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알린은 흥미 없다는 얼굴로 말을
“어스듐 라인을 대대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워낙에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거기다 어디에 어떻게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니까 기술자 한두 명 가지고도 안 되니 예산을 짤 수가 없어. 어스듐 라인 쪽 기술자들은 전쟁 때 망가진 중요 시설물을 보수하는 데 거의 다 투입되어 있어서 말이지.”“이러다 정말 큰일 한번 날 것 같아요. 성벽에서도 그랬고.”“안 그래도 성벽 쪽에 비상용 어스듐 라인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된 지 꽤 되었단다.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문제지만, 어쩔 수 없지.”“그렇군요.”티노는 고개를 끄떡여 보인 뒤 진짜 알아내고자 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꺼냈다.“친위
그날 밤, 티노는 세척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두 개의 목걸이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겉보기엔 똑같은 목걸이들이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봐도 차이점이 있었다.“아르카 녀석, 너무 험하게 다룬 거 아냐?”티노는 항상 목걸이를 옷 안에 넣어 두기 때문에 그의 것은 흠집이 거의 없었다. 그에 반해 아르카 것은 훨씬 낡았다. 때가 탔다거나 먼지가 낀 것은 아니지만 미세한 흠집이 전체에 깔려 있어서 낡은 느낌을 줬다. 그 때문에 목걸이의 멋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고풍스러운 매력만 더해졌지만, 이거 만든 지가 언제인데 벌써 이 상태인 건지……. 보아하니 그냥 걸고 다녔던 모양이다. 실험을 위해 몬스터 사냥을 부지런히 하는
티노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답하고 숙소로 향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티노는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좋은 약을 쓴 것은 아니더라도 어스듐이 섞인 약이라 그럭저럭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일부러 풀지 않았다. 아직 자유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방 사람들의 동정과 양해가 필요했다.“티노!”라디가 달려왔다. 이미 티노가 다쳤다는 걸 알면서 새삼 낯빛이 안 좋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다. 이 정도는 부상 측에도 끼어 주지 않는 할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컸기 때문일까?“들었어! 플로레스라한테 당한 거라며?”“…
얼굴 전체를 가리는 기계 투구를 쓴 남자가 한 손으로 티노를 낚아챈 순간 갑자기 모든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남자는 허공을 딛고 부드럽게 위로 솟구쳤다. 그 순간 그가 입은 긴 망토를 뚫고 그의 등 뒤로 희미하게 빛의 날개와 같은 것이 펼쳐졌다. 티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오직 플로레스라의 버킷만이 저와 같은 형상을 자아낼 수 있다. 하지만 플로레스라가 왜……?티노의 의문은 채 매듭이 되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그의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목걸이. 우아하게 넝쿨을 자아낸 철 틀 안에 담긴 정체불명의 수정조각. 티노에게도 그와 똑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아르카……?”어째서 아르카가 이곳
지금의 수도를 감싸고 있는 성벽은 휴전 후 새로 쌓아 올린 것이다. 예전 것은 전쟁으로 무너진데다가 수도의 외각지대가 파괴되어서 현재 건재한 부분만을 감싸도록 범위를 축소해 만들었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위험도 있고, 기존의 성벽이 무너지자 침범해 오기 시작한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방어선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빠듯한 예산과 촉박한 시간 속에서 급히 지어진 성벽은 견고함이 떨어졌다. 때때로 몬스터가 무리를 이뤄 침입하면 바로바로 보수공사를 해 줘야 했고, 거기에 보강공사까지 수시로 이뤄지고 있었다.한쪽에서는 몬스터와의 전투, 한쪽에서는 보수공사, 한쪽에서는 보강공사, 그 와중
“갑자기 원석을 잔뜩 가지고 오셔서는 당장 필요하다고 세척해 달라잖아? 그래서 해 드린 것뿐이야. 덕분에 한숨도 못 잤다고.”“왜 신참인 너한테 부탁하셨대? 나나 웨이 선배도 있는데…….”“너나 웨이 선배는 승급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러셨겠지. 게다가 라디는 여자잖아. 밤을 새워야 할 일을 시키고 싶으셨겠어?”아마 시문은 필요하다면 남녀노소 안 가리고 똑같은 일을 시켰을 것 같지만 듣기 좋은 소리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청취자가 아침과 저녁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요리사라면 더더욱!“하긴……. 시문 님은 다정하신 분이니까!”두 눈에서 이글거리던 불꽃이 어느새 콩깍지가 잔뜩 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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