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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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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그리곤 다시 한 번 푸핫, 하고 묘한 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쭉 펴고 티노를 새삼 곧게 마주보았다.

“이번 거래는 나와 하는 것이 아니라 친위대와 하는 거다. 거래 조건은 단순히 사관학교에 추천받는 것 이상이지. 사관학교 추천은 물론, 졸업 후 친위대에 받아 준다는 조건이니까.”

“와……!”

티노는 과장되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조건이 조건이니만큼 티노의 과장된 반응은 전혀 ‘과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별 관심 없었고 구미가 당기지도 않았다. 티노는 테이슨과의 거래가 끝난 상태에서 시문과 거래했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친위대나 사관학교의 입성이 걸려 있다 해도 약속을 깰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문은 티노를 정확하게 파악한 셈이다. 티노는 램에게서 기밀유지와 비밀엄수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받으며 커 왔다. 그것은 티노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원칙인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어린 시절에 아르카와 남몰래 교류하는 것 따윈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티노의 속내야 어찌 됐든 겉보기에는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에 테이슨은 정색했다.

“조건이 좋아진 만큼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단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어지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될 게 분명해. 부디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했으면 좋겠어. 네가 거절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동료들을 막겠다.”

“…….”

어떻게 해야 의심을 사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티노에게는 시기적절하게 변명거리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티노는 흔들리는 눈으로 테이슨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밖을 보면서 다시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어쨌거나 친위대 지망생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위험하다는 소리에 물러난 모양새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위험 따윈 아무렇지 않아요. 어차피 시문 님의 작업실에 불려 들어가는 입장인데 감시당한다 생각 말고 감시한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래…….”

테이슨은 감추려 애는 쓰지만 실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성을 냈다. 티노는 애써 밝게 웃는 시늉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절 쭉 도와주고 챙겨 주고 신경 써 주신 테이슨 경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요. 테이슨 경이 그렇게 반대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티노…….”

거절했으면 하는 의중을 노골적으로 내보였지만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테이슨은 당혹스런 얼굴로 티노를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그런 뒷거래가 아니더라도 착실히 준비해서 반드시 들어갈 거니까요!”

티노는 씩씩하게 말하며, 테이슨이 내려놓은 교재를 집어 들었다.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이해는 못 하겠어서 전부 외우는 수준이지만.”

“티노……!”

테이슨은 당혹감을 떨치지 못한 채 티노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몰래 들어온 입장을 잊지 않고 작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호쾌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 이 녀석아! 공부라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도저히 모르겠는 건 체크해 두고 있어요!”

“후후. 그래, 나중에 한 번에 봐 주마.”

테이슨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 가 봐야겠다. 다음에 상황을 봐서 다시 올 테니까.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티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긴 테이슨은 창밖을 살핀 뒤 창문을 열었다. 그러다 우뚝 멈추더니 다시 티노를 돌아봤다.

“티노.”

“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알았다니까요?”

테이슨의 거듭되는 당부에 티노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거만하면서 경솔한 척 대답했다.

“되도록 자주 방문하도록 할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하고.”

“예, 그럴게요. 오시면 공부나 도와주세요.”

“그래.”

영 안심이 안 된다는 얼굴로 티노를 보던 테이슨이 창문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문제가 생기면 이 창틀에 종이를 껴 놓으렴. 급히 날 봐야 할 일이 생겼을 때도.”

그리곤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한 장을 찢어서 뭔가를 휘갈겨 쓰고 건넸다.

“이건 내 영상전송장치의 번호다. 기다릴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공방 내에 공용 영상전송장치가 있을 테니까.”

“예, 그럴게요.”

티노는 냉큼 종이를 받았다. 그제야 테이슨은 조금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히 사라졌다.

테이슨의 모습은 그가 창밖을 나선 순간 사라졌지만 티노는 배웅을 하듯이 창가에 우뚝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티노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그것을 책상 서랍에 잘 넣어 두었다. 하지만 그걸 다시 꺼낼 일은 없으리란 걸 누구보다도 티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이제는 많이 무심해진 공방 직원들이 ‘청소는 잘되어 가냐?’라고 인사처럼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라디가 의심스러운 듯 ‘그러고 보니 쓰레기를 가지고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네?’라고 혼잣말인 양 추궁해 와서이기도 했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들로 인해 생생하게 떠오른 어제 테이슨과 한 대화였다. 이미 친위대에서 수색을 하고 간 곳이니 이곳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을 텐데, 청소부로 부려진다고 했으면서 전혀 손을 안 댄 것을 보면 수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시문 님, 진짜 이곳도 청소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째서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시문의 모습에 티노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작업실 꼴을 보고도 저런 소리가 나오나?

“어째서라니요? 보세요! 어디선가 버섯이라도 피어 있을 것 같은 꼬락서니잖아요?!”

“이곳은 환기 시설은 물론 인간에게 쾌적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버섯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

티노는 더 말을 섞어 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쨌거나 전 조금이라도 청소를 해야겠어요. 다들 제가 청소를 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조금은 시늉이라도 해야지요.”

“어차피 아무도 못 들어오는데요?”

“제가 괴로워요.”

난장판 수준이 아닌 시문의 작업실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시문은 여전히 이해는 안 된다는 눈으로 습관성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치우고 싶으면 어쩔 수 없죠.”

저쪽 작업실을 치워 주는 건데 어째 이쪽에서 감사해야 할 분위기다. 티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우선 바닥에서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는 온갖 것들을 해체하기로 했다.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은 어떻게 구분해요?”

“글쎄요…… 아, 구겨진 종이 같은 건 버려도 됩니다.”

그럼 구겨진 종이부터 건져 내 볼까? 티노는 주위를 둘러보다 저편에 쑤셔져 있는 봉투를 용케 발굴해 냈다. 펼쳐 보니 크기가 제법 컸다. 그것의 주둥이를 둥글게 말아서 바닥에 놓고 온갖 잡것들 중에서 구겨진 종이만 재주 좋게 집어넣기 시작했다.

“시문 님의 개인적인 것들이 적혀 있는 것들일 텐데 그냥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되는 거예요?”

“설마요.”

시문은 욕실과 침실 사이의 벽으로 걸어가서 허리 높이쯤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종이 따위가 몇 겹으로 두텁게 붙어 있는 벽을 손으로 더듬다가 어딘가에 손가락을 찌르듯이 밀어 넣더니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티노의 상반신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여기다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시문은 다시 주변을 더듬다가 종이 아래로 손을 비집어 넣고는 위로 올렸다. 간신히 자취만 보이는 벽에 작은 매립형 스위치가 있었다.

“여기 스위치를 누르면 알아서 양에 맞춰 소각되고 자동으로 꺼집니다.”

“…….”

티노는 기막히다는 얼굴로 소형 소각로와 시문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그렇게 가까운 데에 소각까지 되는 쓰레기통이 있구만! 왜 바닥에 잔뜩 쌓아 두신 거예요?”

“좀 쌓이고 나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게 편하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넘치도록 쌓인 거 아닌가요?”

“그런가요?”

시문은 자신의 작업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눈매나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엔 장난기가 없었다.

“아직은 비밀문을 열 때나 걸을 때 무너지는 것도 없고, 작업대도 잘 보이는데요?”

“…….”

그건 쓰레기에 파묻힌 거지, 이 사람아…….

티노는 시문의 일이라면 우선 미화시켜 놓고 보는 공방 직원들, 특히 라디를 떠올려 보았다. 이 일을 그대로 알려 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이번에야말로 환상이 깨지려나? ……아니, 안 그럴 것 같다.

“하아. 알았어요. 어차피 오늘은 이 바닥에서 구겨진 종이만 솎아 내다 끝날 것 같으니까 내려가 작업하시던가요.”

“제 작업실을 다른 사람이 헤집고 다니는데 속 편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나요?”

시문은 자신의 작업대에 앉았다. 그리곤 굴러다니는 필기도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자기 작업실이라고, 뭔가를 찾기 위해 헤매지는 않았다. 이어서 겹겹이 쌓여 있는 종이 중에서 중간쯤에 있는 뭔가를 재주 좋게 뽑아내더니 작업대에 펼쳐 놓고는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티노가 시문의 작업실에 들어오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시문이 티노만 남겨 놓고 나가지 않는 이유는 이해하고도 남았기에 티노는 자신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커다란 봉투 하나가 꽉 찼다. 티노는 제자리에서 한 걸음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는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밟아가며 소형 소각로로 가서 봉투를 탈탈 털었다. 아직 한참 남았기에 소각 스위치를 누르진 않았다. 그리고 다시 아까 자리로 가서 줍기 시작하며 물었다.

“이거 작품 스케치 하다가 버리신 것들이에요?”

“대부분 그렇죠.”

“마음에 들지 않는 스케치라도 보통은 보관해 놓지 않아요? 나중에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잖아요?”

“램 장인은 그러시던가요?”

“전부 모으는지는 모르겠지만 설계하다가 밸런스나 뭐 그런 것들이 안 맞아 실패한 도면들도 스크랩해 놓더라고요.”

“하긴 기계공학 쪽이라면 나중에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군요. 전 애초에 영감을 떠올려 그리는 것이라, 떠올린 걸 완벽하게 옮겨 넣을 때까지 다시 그리고 그리길 반복합니다. 그러니 결과물만 있으면 되죠.”

“헤에. 그렇군요.”

예술적 감각이라곤 약에 쓰려야 없는 티노에게는 구름 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뛰어난 공예가이기도 한 아르카의 옆에서 주워들은 것이나 구경한 것들이 많아서 대충 알 것도 같긴 했다.

티노는 그새 또 꽉 찬 봉투를 들고 한숨을 푹 쉬며 소각로로 갔다. 아무래도 하루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았다. 시문이 며칠이나 시간을 내줄 리 없으니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다시 소각로 입구에 봉투를 탈탈 터는데 시문이 지나가는 말투로 여상스럽게 물었다.

“테이슨 경과 얘기는 잘 했습니까?”

“……?!”

티노는 시문을 홱 돌아보았다. 그 자신이 결백했기 때문에 뜨끔했다거나 찔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놀란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 공방에서 일어난 일을 왜 모르겠습니까?”

시문은 여전히 종이에 뭔가를 대충 휘휘 그리면서 감정 섞이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마치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 중 하나라는 듯이.

“제 작업실에 들어오게 됐다고 하니까 잘됐다고 염탐 좀 해 달랍니까?”

“그보다는 절 걱정하셨어요.”

테이슨이 전해 준 친위대의 제안에 응할 생각도 없고, 응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알리기도 싫었다.

“그랬겠죠. 예전부터 오지랖 넓기로 유명한 분이니.”

시문은 피식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냉기가 어렸다 사라졌다.

“그…… 테이슨 경의 선배라는 분과 셋이서 친하셨다면서요? 시문 님의 친구 분이기도 한…….”

“케이 말입니까?”

“케이요?”

티노가 되묻자 시문이 그를 돌아보았다. 안경 아래에 비치는 눈동자가 의외로 웃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예.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그러고 보니 그분 성함은 처음 듣네요.”

“그렇습니까? 수도에서는, 아니 군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름이죠. 그래서 테이슨 경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군요. 테이슨 경이 ‘선배님’이라고 하면, 그게 곧 케이니까요.”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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