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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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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웨이가 넉살 좋게 실실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힐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니 제발 이번엔 정신 차리고 수준에 맞는 걸 만들어라.”

“이상을 높게 가져야지요!”

“최종 목표는 높게 잡아도 상관없지만 현실은 수준에 맞춰 살아라. 너도 이제 수습 딱지는 떼야지!”

“저도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습 기술자에서 벗어날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

웨이가 의외로 결연한 모습을 보이자 힐을 비롯한 직원들은 잘 생각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얄미운 점도 있고, 한심한 점도 있지만 공방의 몇 없는 젊은 인재다 보니 그들로서는 자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인 공방이라 더욱 그랬다.

“그럼 티노, 우린 가 보마. 이 녀석도 그렇고, 라디도 그 상태니까 오늘은 네가 좀 수고해 줘야겠다.”

“아, 원석 세척이랑 수거요? 걱정 마세요. 하루 정도라면 시문 님도 괜찮다고 하실…….”

“아니, 아니.”

힐을 비롯한 직원들이 일제히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수습 기술자의 승급시험 때문에 시문 님의 일정에 차질이 가면 되겠냐?”

“맞아! 그게 아니라 네가 시문 님의 식사를 준비하란 뜻이야.”

“원석 세척이나 수거를 하루쯤 안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한꺼번에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용케 핵심만 뽑아 들은 티노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챙기는 김에 라디한테도 식사 좀 갖다 줘.”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또래니까 너한텐 속을 털어놓을지도 모르잖아?”

“근래 사이가 별로라고 들었는데 이참에 서로 풀면 좋고.”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싫다고 하면 속 좁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 그냥 웃기만 했다.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나가 버리자 티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팬케이크를 구워 볼 참이었다. 꿀과 버터를 섞어 내고, 소시지를 굽고, 샐러드를 곁들이면 아침식사론 부족함이 없겠지. 감자도 구워 볼까?

티노가 식량 창고를 뒤지며 메뉴를 고민하는데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부엌 밖을 보니, 라디가 식당문에 서서 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는 게 보였다.

“다들 나가셨어. 웨이 선배 아침 사 주고 시험장까지 같이 간다고.”

“…….”

라디는 이렇다 할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어깨의 힘이 쫙 빠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편안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평소보다 훨씬 무겁고 어두웠다. 표정도 행동도 분위기도. 그럼에도 시문의 식사를 챙기러 나온 것이 라디답다고 생각되었다.

부엌으로 들어선 라디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푸석해져 있었다. 낯빛은 허옇게 떴고,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 밑은 거멓게 내려앉아 있었다. 입술은 붉었는데 계속 깨물어 댔는지 피딱지가 약간 맺혀 있었다. 그 상태로 이런저런 재료를 꺼내 늘어놓는 걸 보고 있자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

물론 이런 식으로 무시하리란 것은 예상했지만 말이다. 티노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기가 먹을 요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문과 라디의 것을 만들 필요는 없어졌지만 메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밀가루 따위를 꺼내며, 무시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재차 물었다.

“왜 안 가는 거야?”

“…….”

현 상황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질문을 한 것인데 라디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리곤 조리대 끝을 두 손으로 잡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 상태로 깊이 심호흡하고, 심호흡했지만 그럴 때마다 숨결은 불안정하게 흐트러졌다.

잘못 건드렸구나, 라고 티노가 혀를 찬 순간 조리대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라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꾹꾹 억눌린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와서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재차 심호흡을 해 가며 팬을 불 위에 올리려 했다. 묵직한 팬을 몇 번이나 미끄러뜨렸지만 꿋꿋하게 불 위로 올렸다.

더 지켜볼 수가 없어서 티노는 라디를 밀치고 불을 꺼 버렸다. 그리고 라디를 똑바로 마주보고 물었다.

“왜 그래?”

“알 거…… 없잖……아!”

라디는 차갑게 쏘아붙이려 애를 썼지만 결국 울음으로 뭉개진 음성만 간신히 내뱉었다. 티노는 어제 저녁에 벌어진 일을 보고 대충 짐작했던 바를 끄집어냈다.

“웨이 선배가 무슨 짓을 한 거야?”

“……!”

라디는 금방이라도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덜덜 떨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엉엉 울어 버렸다.

“흑흑! 그 나쁜……! 그 나쁜 자식이……!”

욕도 제대로 못하고 더듬더듬 힘겹게 말하다가 이도저도 다 포기하고 울기만 했다. 티노는 그 옆에 앉아서 기다려 주었다.

“그러니까 웨이 선배가 이걸 망가뜨렸다?”

“…….”

라디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의 식탁 위엔 두꺼운 펜처럼 생긴 공구가 놓여 있었다. 뒤에 회로를 연결하여 어스듐으로 작동시키는 도구로서 원석 가공의 밑작업을 할 때 쓰이는 기본 공구였다.

“그제부터 갑자기 서로 일을 분할해서 하자는 거야. 내가 원석 세척하는 동안 자기가 수거해 오겠다고.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오전에 일을 다 처리해 놓으면 오후엔 시험 준비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나쁜 제안은 아닌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그러기로 했고.”

라디는 분하다는 듯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세척한 원석을 갖다 놓으러 간 사이에 이게 망가진 거야! 그 나쁜 놈은 자기는 원석 수거하러 갔었다면서 시치미 떼고! 하지만 매일 원석을 수거하는 거라면 하루는 세 곳, 하루는 두 곳이었을 거 아냐? 그런데 그제, 어제 모두 돌아온 시각이 똑같았어! 분명 어제 두 곳 돌고 돌아와서는 내가 자리 비우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수습 기술자에게도 공구는 귀하고 중요한 물건이다. 때문에 라디도 평소에는 서랍에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아마도 라디가 원석이 닦이길 기다리면서 밑작업을 하는 순간을 노린 모양인데…….

티노는 라디의 공구를 들어서 살펴보았다.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흔히 사용하는 것들보다 훨씬 간단한 구조의 공구였다. 때문에 회로 연결 부위가 기이하게 꺾여 있는 것을 금방 발견했다. 확실히 그걸 가지고 시험을 보는 건 무리였다.

“다른 공구를 구하면 되지 않아? 돈이 없으면 선배들 것을 빌려도 되고…….”

“넌 이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라디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웨이라는 더 큰 적이 생겨서인지, 실컷 울면서 응어리가 풀린 것인지, 아니면 상황이 막막하여 경계심마저 잊어버린 건지 그녀의 음성에 가시가 빠져 있었다.

“등록한 공구로만 시험을 칠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니야.”

라디는 티노의 손에 들린 자신의 공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손에 익은 공구가 아니면 하기 힘들어. 원석 가공에 쓰이는 공구들은 자신의 손에 맞춰서 제작한다고. 그러니까 남의 것을 빌려 봐야 손에 안 맞아서…….”

“그럼 고치면 되잖아?”

“공구가 하루 만에 뚝딱 고쳐지는 줄 알아? 거기다 원석 가공 공방은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수리를 맡겨도 며칠은 걸린단 말이야.”

말하다 보니 또 울컥 치미는지 라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분하다며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분명 내가 이번 시험에 합격할까 봐 수작을 건 게 분명해!”

일리가 있다. 웨이는 벌써 몇 년째 수습 기술자로 있는데 들어온 지 몇 개월 안 된 라디가 승급해 버리면 모양이 안 서니까. 최악의 경우 웨이는 또 떨어지고 라디만 먼저 붙을 수도 있고 말이다.

티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자신의 공구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도 구조를 파악한 라디의 공구를 깔끔하게 분해해 버렸다. 당연히 라디는 펄쩍 뛰었다.

“뭐 하는 거야?!”

“…….”

회로 연결 부분을 완전히 빼내서 살펴보니 심하게 휘지는 않았다. 작심하고 지능적으로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던진 수준이다. 이 정도라면 새 부품으로 갈 필요도 없다.

티노는 가는 펜치를 꺼내어 힘주어 편 뒤 미세한 간극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기함을 하며 벌떡 일어났던 라디는 그 모습에 넋을 잃은 듯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티노가 손을 놀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디의 눈에도 티노의 흔들림 없이 능숙하고 노련한 손놀림은 퍽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만약 고치지 못한다 해도 마음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티노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티노…….”

“음……?”

티노는 대답을 한 건지 반응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목소리를 흘렸다. 라디는 탁자에 엎드린 채 티노의 손놀림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몇 년 전 전시회에서 시문 님의 작품을 보고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그랬었지.”

“그게 5년 전이었어. 엑서디움 전쟁이 끝나고 두 해가 지난 뒤였지.”

“그래……?”

티노는 성의 없이 추임새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 그는 연결 부위를 빛에 비춰서 펴진 상태를 확인해 가며 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라디는 그런 티노의 반응엔 신경 쓰지 않고 줄곧 티노의 손놀림만 멍하니 보면서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전시회에서는 엑서디움 전쟁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전사들을 기리는 추모전이라고 광고를 해 댔어. 난 그게 화가 났었어. 전사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도 못하는 주제에, 왕성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위선자들이 시민에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전시회 따위나 열면서 위해 주는 척 생색내는 꼴이 정말 싫었어.”

“흠…….”

티노는 라디를 잠깐 보았다. 명랑하고 쾌활한 라디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신랄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라디 자신은 지극히 덤덤해 보였다.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길에 붙어 있는 전시회 광고지를 보는 순간 충동적으로 가 버렸지. 가고 나서는 더 화가 났어.”

“……감동 받았다더니?”

내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색이었던 티노가 몇 박자 늦게 물었다. 라디는 고개를 두어 번 끄떡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조각상도 있었고, 전초기지에서의 대대적인 전투를 집채만 한 크기로 커다랗게 구현화한 것도 있었어. 뭘 모르는 내 눈에도 그 전시회의 수준 자체는 높아 보였지.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죄다 큰 공을 세운 군대장이나 귀족들뿐이었어. 무장한 국왕 전하의 조각상은 전시장 중앙에서 온갖 조명을 받고 있었지. 플로레스라의 수도를 통쾌하게 파괴한 모습이나, 우리 수도를 침범한 그들의 잔악함을 묘사한 것이나…….”

“듣는 것만으로도 대충 그려진다.”

라디가 그것을 보며 화가 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응…….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화만 났어. 그러다 시문 님의 것을 보았어.”

라디의 음색이 희미하게 바뀌었다. 어찌 들으면 밝아진 듯도, 어찌 들으면 흐려진 듯도 한 애매한 변화였다.

“플로레스라가 우리 수도를 침범해 왔을 때, 그들을 막고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 준 일반 병사들……. 가족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수도를 침범한 적들의 정예군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우리 병사들…….”

티노의 손이 잠깐 멈췄다. 대충 흘려들었던 라디의 말이 새삼 뚜렷하게 와 닿았다.

“라디, 너…….”

“죽음을 각오하고 자부심으로 웃고 있는 우리 병사들…….”

티노의 말을 들을 생각 없이 라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 중엔 나의 부모님도 계셨어.”

“…….”

라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티노는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여태 펴고 있었던 연결 부위를 마지막으로 꼼꼼히 확인하고 이어서 어긋나 있는 내부의 회로를 맞췄다. 그리곤 원석을 깎아 내는 날 부분을 살펴본 뒤 약간 헐거워져 있는 나사를 조였다. 마지막으로, 떼어 내었던 껍데기를 도로 씌우고 흔들림 없이 단단히 조립했다. 손잡이 부분 쪽에 금이 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거기는 티노의 영역 밖이니까.

라디는 여전히 탁자에 엎드린 채로 티노의 손놀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요즘도 그 사람 만나?”

“그 사람이라니?”

“……테이슨 경 말이야.”

테이슨에게 존칭을 써 주는 것이 대단히 티껍다는 어조였다. 그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 며칠 전에 테이슨이 공방에 찾아왔었다고 솔직하게 답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감옥에서 헤어진 뒤론 못 만났어. 왕성의 씨드까지 끊긴 사건이니 조사하느라 바쁘겠지. 왜?”

“정말 안 만났어?”

“못 만났다니까.”

“…….”

티노는 조립까지 마친 공구를 라디에게 건넸다. 티노 수준에서는 고쳤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아예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면 몰라도 휘어진 것을 완벽하게 복구하는 것은 어지간한 수리공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노는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라디를 배려하여 한마디 덧붙여 주기까지 했다.

“제대로 고쳐졌나 한번 써 봐.”

“……고마워.”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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