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이 끝난 지 벌써 10여 년.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재앙 때 일어난 대지진을 이겨 낸 기존 건물을 보수하거나 개량해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특히 정원까지 플레이그 스톰으로부터 보호받는 건물들의 개발은 사람들의 쾌적한 거주 지역을 한층 넓게 만들었다. 좁아터진 실내가 아닌 정원까지 안전한 신형 주택들은 안전과 쾌적함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반경 20킬로미터에서 한 번도 규모가 큰 플레이그 스톰이 일어난 적이 없는 노만 마을에서 그런 신형 주택은 왠지 가진 자의 사치로 보일 뿐이다.신공법으로
2019-07-15
1년 전 교통사고로 이자벨의 엄마와 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이자벨 역시 큰 부상을 당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몇 개월간의 집중치료로 이자벨의 상처는 아물었으나 엄마를 잃은 아이의 마음은 아물지 못했다. 심한 거식증과 더불어 찾아온 실어증. 이자벨은 엄마 없는 세상과의 영원한 단절을 선택한 듯싶다.루드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실수인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닉스 연방의 중앙관료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또 마지막 한 사람이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온다.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이 딸마저 또다시
“아이딘!”“고생 많았어, 아이딘!”두 덩치가 가장 신이 났다.“하하, 다들 잘 있었어?”아이딘이 예상치 못한 두 덩치의 환대를 받으며 예리엘을 바라보았다. 예리엘 역시 환영의 반가운 미소로 화답한다.“모두 고마워. 덕분에 금방 풀려났어.”“다 페이 덕분이야.”참견쟁이 잭슨이 말한다.“헤헤. 나 페이 덕분에 졸지에 경비대장의 동생이 돼 버렸어.”“네, 그래요.”레이나가 활짝 웃는다.“암튼 다행이야.”예리엘이 아이딘의 손을 잡아 쥔다. 아이딘도 씩 웃으며 예리엘의 손을 정겹게 잡아 쥔다.아이딘 일행은 신나는 발걸음으로 원샷을 향해 걸어갔다. 도적떼를 막기 위해 쌓아진 북쪽 외벽에서부터 원샷이 있는 상업지구까지는 빠
사실 그보다는 아이딘을 철저히 조사해 보라는 거듭된 상부의 지시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하, 피곤하네.”아이딘의 심문을 맡게 된 미하일 중위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진을 빼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좁고 어두운 심문실에서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딘과 마주한 채 앉아 있던 것도 벌써 반나절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이봐,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그렇지?”경비대 소속의 중위라면 적어도 이 작은 마을에 있어 꽤나 높은 지위다. 떠돌이 아이딘에게 필요 없는 존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딘 역시 이를 전혀 불쾌감 없이 받아들였다.“네.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아이딘이 숨이 가빠지는 괴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괴물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도대체 왜. 네가 왜 나를? 우리는 동료 아니었던가? 적어도 그 지옥 속에서는.”그러나 괴물의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을 뿐 아이딘에게 한마디도 전달되지 않았다.“어서 말해! 누구냐니까?”아이딘이 괴물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흔들자 괴물의 손가락이 아이딘을 가리킨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멍한 눈으로 아이딘을 쳐다본다. 원망, 분노, 고통이 어우러진 듯한 그의 멍한 눈동자가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다. 그 모습에 아이딘도 더 이상 윽박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괴물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아이딘에게 있는 신경질 없는 신경질을 다 부렸었다. 그런 그녀의 투정을 아이딘은 아무 불평 없이 받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어쩔 수 없이 아이딘의 약혼녀를 만나기로 했지만 예리엘은 역시 괜한 심술이 났다. 그래서 금방 끝날 총기 배달을 질질 끌기로 했다. 그럼 적어도 약속시간에 늦어 오빠의 약혼녀를 골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밖에서 때우고는 건스미스 원샷원킬로 돌아오는 순간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널브러진 시체들과 곳곳에 뿌려진 혈흔들. 예리엘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시큼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대재앙 이후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제정신으로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런 미치광이는 어디에나 흔했다. 헥터는 그냥 그를 보내 줄까 생각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히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헥터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한테 분풀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헥터가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으로 자신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생명줄인 서바이벌 나이프를 챙겨 들고 미치광이에게 다가갔다. 미치광이는 곧 죽임을 당할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겁 없이 다가오는 헥터를 보며 여전히 실실 웃고만 있었다.헥터가 미치광이에게 빠르게 단검을 찔러 넣
아이딘의 고문은 계속되었다.“이제 겨우 대화할 자세가 된 것 같네. 그럼 묻겠다, 네놈들이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차용증 어디 있어?”“그, 그건 왜……!”빠드득!“아아악…… 아파, 제발 그만해!”빠득!“후웁…… 후우웁……!”“이제 열다섯 번 남았다.”아이딘은 엉망이 된 헥터의 왼손을 던져 버리고 오른손을 잡아끌었다.“다시 묻는다. 차용증 어디 있어?”“의, 의자…… 의자 밑에……저기…….”헥터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겨우 대답했다. 아이딘은 창고 끝에 놓여 있는 목조 의자로 다가가서는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쾅!의자가 지면에서 붕 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났다. 의자가 치워진 카펫을 들춰 보니 철
아이딘이 고개를 끄덕인다.“결국 헥터에게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고 아마 그 빚이 덴젤이 죽은 후에도 그대로 레이나에게 넘어간 거 같아. 그리고 빚을 안 갚으면 미쉘을 빚 대신에 팔아 버린다고 협박을 해서 그놈들 패거리랑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어. 좀 불쌍하지.”“도와주는 사람들도 없었어?”“휴, 그게 말이야. 헥터 패거리들에게 돈을 빌린 마을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고…… 게다가 헥터 이 녀석이 경비대에도 미리 손을 다 써 놓아서 뭘 어찌하기가…….”잭슨이 쭈뼛쭈뼛하면서 답을 했다.“나도 얼핏 그놈의 장부를 봤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더군.”“장부라고?”“뭐, 돈 빌린 사람들이 워낙 많다
“아, 개운하다.”아이딘이 비누 냄새가 풍기는 몸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김이 서린 샤워실 거울에 물을 뿌려 자신의 몸을 비추어 보았다. 빨간 머리에 잘 빠진 몸매. 자신의 눈에도 참으로 조각상 같은 몸으로 비쳐졌다. 어느 한 군데 흠 잡을 곳이 없었다.“무슨 흉터가 이렇게 많지?”그런데 몸 구석구석에 누가 낙서라도 해 놓은 것처럼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특히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복부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는 눈에 거슬렸다.“이 많은 상처들은 뭐지? 군인이었나.”아이딘은 어깨와 가슴 부위에 연이어 있는 총상 비슷한 흉터 하나를 더듬으며 말했다.“그냥 다 잊고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군.”과거의 흔적을 발견하
잭슨이 이마에 손을 얹고 폭풍이 쓸고 간 자리를 살폈다. 미처 건물에 들어서지 못하고 플레이그 스톰에 휩쓸려 버렸던 여러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찰과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행이도 큰 부상은 아닌 듯싶었다.“가벼운 플레이그 스톰이라 불행 중 다행이네.”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잭슨에게 아이딘이 물었다.“플레이그 스톰? 그게 뭐지?”잭슨과 호퍼는 아이딘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 플레이그 스톰을 모르는 걸까 하는 의문의 눈초리다.“너 또 장난하는 거냐?”“그런 거 아닌데.”“플레이그 스톰을 정말 몰라?”“정말 몰라.”아이딘은 플레이그 스톰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두 덩치의
가까이 다가온 아이딘이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잭슨에게 돌연 손을 건넨다. 이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잭슨이 잠깐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이제 그만하고 우리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생뚱맞은 아이딘의 말에 두 덩치의 눈과 귀가 쫑긋한다.“내가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여기 좀 머물러야 하거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그냥 친구나 하자.”그렇게 말하며 아이딘이 상냥하게 웃는다. 두 덩치는 아이딘이 자신들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치만 살피며 눈만 동그랗게 떴다.“자. 어서…….”아이딘이 오른손을 호퍼에게도 건넨다.“어때.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니까…… 싫
Chapter 2. 싹트는 우정하늘이 맑게 갠 아침. 아이딘은 비교적 일찍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문에 손을 가져가 보니 문은 열려 있었다. 어젯밤에도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났으니 오늘 아침 일찍 자물쇠를 풀어 놓은 듯싶다. 이런 죄수 같은 취급이 어떻게 생각해 보면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적어도 총을 겨누지 않으니 그 정도가 어딘가 싶었다. 그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신세를 지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조건일 거라고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예리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작업대 테이블에 와 보니 경비대에 다녀올 테니 냉장고에 있는 샌드위치를 먹으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2018-06-27
그때 빨간 머리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인다. 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호퍼의 움직임이 멎는다. 그의 이마에서 어느덧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예사로운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호퍼는 단번에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빨간 머리의 움직임에는 빈틈 하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덩치만 커 가지고.”빨간 머리가 호퍼를 자극하지만 호퍼는 허리의 통증마저 미처 가시지 않은 상태다. 자신도 모르게 순간 멈칫한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진다. 호퍼의 자존심이 더 이상 시간에게 양보를 구하기는 힘들었다.“잘 만났다. 너 이 자식!”호퍼가 잠시 멈추었던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빨간 머리는 그의 주먹을 기다
모처럼의 첫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어서 오세요!”“예리엘! 오랜만이야! 우리 애기가 네 얼굴 못 봐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아. 우리 애기 잘 있었어?”예리엘은 손님이 건네주는 M14 한 정을 가볍게 건네받았다. M14는 과거 미국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미군에서 제식 소총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M16과 함께 닉스 연방 중앙군의 제식 총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닉스 연방에서 가장 흔한 총 중에 하나였다.단지 내부 메커니즘이 다른 총들에 비해 비교적 복잡한 형태라서 웬만한 손재주가 아니고서는 관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소총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무나 손쉽게 손을 볼 수 있는 총은 아니었다.예리엘이 탄창을 빼고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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