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e스포츠는 창간 4주년을 맞아 e스포츠를 만들어가는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매일 밤 늦게 퇴근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e스포츠 현장 담당자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 보시지요.
'드라마의 제왕'이라는 드라마를 보셨나요. 정려원이 신출내기 작가로 등장합니다. 저작권을 놓고 싸우기도 하고 주연을 맡은 남녀 배우와 싸우기도 합니다. 제작사 대표로 나오는 김명민과는 앙숙으로 나오죠. 작가라고 말하면 다들 정려원 같은 삶을 사는 줄 아십니다. 그러나 저는 방송 작가입니다. 아니, e스포츠 작가입니다.
e스포츠가 스포츠인가를 놓고 여전히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죠. 그런데 작가라는 직업이 왠말이냐고 물으십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스포츠의 은유이고 e스포츠가 스포츠라면 각본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을 하시죠. 그런데 저는 e스포츠 작가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러니까요.
제가 맡고 있는 분야는 e스포츠 가운데서도 스타크래프트입니다. 무려 13년 동안 리그를 꾸려온 e스포츠의 대표 종목이죠. 얼마전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스타크래프트2:자유의날개로 전환됐습니다. 사실 스타1과 스타2는 말이 좋아 같은 게임에서 흐름이 이어졌지, 완벽히 다른 게임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실제로 경기 양상도 다르고 종족들의 운영 방식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게이머들의 실력도 스타1과 스타2가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타1 때부터 e스포츠 작가 일을 해온 제가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은 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부담스런 일은 선수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는 일이에요. 야구나 축구, 농구 같은 종목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별명을 붙여주잖아요. 박찬호가 '코리아 특급'이고 홍명보가 '영원한 리베로', 마이클 조던이 '황제'인 것처럼요.
e스포츠 초창기에는 선수들의 특징에 맞게 별명이 있었습니다. '황제' 임요환, '폭풍' 홍진호, '영웅' 박정석, '천재' 이윤열, '몽상가' 강민처럼요. 초창기 선수들이 좋은 별명을 다 차지하다 보니 최근에 좋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딱히 붙여줄 별명이 없는 것이 고민입니다.
작가라는 사람이 선수들 별명이나 짓고 앉아 있다며 한량이라 말씀하실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선수들에 대한 데이터, 히스토리, 근황, 정보 등을 바탕으로 매 경기마다 새로운 원고를 써내려 가야 하거든요.
프로리그의 작가를 한 적이 있는데요. 정말 '노가다' 중의 노가다입니다. 일단 한 팀의 로스터에 소속된 선수들에 대한 근황, 정보를 경기마다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개인리그까지 꼼꼼하게 챙겨봐야 합니다. 매체들이 보도한 선수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수집해야 하고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로스터에 이름만 있고 출전하지 않는 선수들이야 업데이트를 게을리 해도 되지만-죄송합니다, 선수님- 엔트리에 들어 있는 선수들에 대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꿰고 있어야 하죠.
또 전적 데이터도 항상 업데이트해야죠. 각 방송사마다 데이터를 따로 보유하고 있는데요. 경기가 열릴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공식대회이든, 비공식대회이든 선수들이 나서는 대회의 기록은 대부분 넣어 놓습니다. 최근에는 스타2로 전환되면서 거의 한달 가량을 데이터베이스 입력에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시즌2에서는 정말 데이터를 찾느라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스타1과 스타2가 병행해서 진행된 프로리그였잖아요. 스타1은 스타1대로 찾고 스타2는 스타2대로 찾아야 하니까 정말 애를 먹었습니다. 전적 찾아주는 기계가 따로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프로리그는 보통 토요일에 시작해서 주중에 끝이 납니다. 주5일제였을 때에는 토일월화수였고, 4일제였을 때에는 토일월화에 끝이 납니다. 그 중에 토요일과 일요일은 거의 더블헤더-하루에 두 경기를 치르는 것-로 치러집니다. 토요일에 배정된 두 경기는 소화하기 쉽습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충분히 조사를 해서 미리 써놓으면 되니까요. 해설자들이 소화해야 할 대본을 만들고 방송 진행용 큐시트를 넘기면 일이 끝납니다.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 대본을 넘기고 나면 다음편 대본을 위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는데요. 제게는 현장을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가 있습니다. 경기 현장의 열기를 직접 느끼고 다음날에 열리는 리그의 대본을 쓸 때 반영해야 하는 거죠. 선수들에 대한 소개가 정확히 됐는지, 경기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팀별, 개인별 순위에 변동은 없는지, 새로운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없는지, 경기에서 드러난 트렌드는 무엇인지 일일이 챙기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모를 지경입니다.
이렇게 정신 없는 과정을 두 번-더블헤더니까요-치르고 녹초가 되어서 집에 오면 그 때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일요일에 열리는 더블헤더의 대본을 써야 하죠. 일주일 가운데 토요일 밤이 가장 힙이 들고 고됩니다. 그래도 '빵꾸'를 내는 법은 없습니다. 선수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새벽잠을 줄여가면서 경기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까요.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제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채찍질을 하게 됩니다.
정말 졸릴 때에는 축구를 봅니다. 몸을 움직이고 직접 플레이하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보는 스포츠는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원고를 쓰는 시간과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가 생중계되는 시간이 비슷해서 축구를 보면서 영감을 얻습니다. 축구 중계를 보다 보면 뜬금 없이 지나가는 단어들이 있는데요. e스포츠에 차용해도 좋은 것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조제 무리뉴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스페셜원'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옥션 올킬 스타리그에서 우승한 SK텔레콤 T1 정윤종에게 붙여주면 좋을 것 같아서 대본에 몇 차례 적은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시는 분도 있고 무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주말에도 쪽잠을 자면서 원고를 넘겨야 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 선수들이 어렵게 만들어낸 트렌드를 제가 제대로 짚으면서 방송을 통해 전해지고 커뮤니티글이나 기사로 화제가 되면 가장 짜릿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가 지은, 또는 아이디어를 낸 별명이 채용되고 인기를 얻었을 때에도 기분 좋습니다. 뭔가 업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죠.
e스포츠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작가인 저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고 할까요. 업계 자체가 살아 숨쉬고 인터랙티브하게 교감이 계속 오가고 있죠. 저는 작가로 일을 하면서 선수와 게임단, 시청자와 팬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할 때 가장 뿌듯합니다. 시청자와 팬들에게 정보를 주고 선수와 게임단이 더 많은 인지도를 얻을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줌으로써 e스포츠를 더욱 생생한 업계로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스포츠 작가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저보다 팬 여러분들이 더 e스포츠의 매력을 느끼고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데일리e스포츠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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