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계속
◆아직도 깨지지 않은 15연승
박정석은 프로리그라는 팀 단위 대회의 시작을 알린 KTF EVER 프로리그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2003년 6월14일 프로리그 개인전에 출전해 1세트에서 박용욱을 꺾었고 2세트에는 강도경과 호흡을 맞춰 출전한 팀플레이 경기에서 동양 오리온(현 SK텔레콤 T1)의 이창훈과 김성제 조합을 격파하며 하루에 2승을 따냈죠.
이날 팀플레이와 개인전에서 각각 승리를 거둔 박정석은 팀플레이와 개인전이 공존하는 당시 프로리그 방식에 특화된 선수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했습니다. 1편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박정석은 팀플레이를 통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익혀갔고 이후 개인전 능력을 업그레이드시켰는데요. 2003년 당시 프로리그는 MBC게임의 팀리그와 달리 팀플레이 부문을 경기 중에 넣으면서 단체전의 느낌을 강하게 줬죠. 공식전에서 팀플레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박정석을 위한 대회였습니다.
박정석은 동양과의 겅기에서 2승을 달성한 이후 정규 시즌 팀플레이 8연승, 개인전 7연승을 이어가며 프로리그 15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박정석은 팀플레이와 개인전을 오가며 출전했고-지금과 같이 중복 출전 금지에 대한 규정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프로리그 정규 시즌 최다 연승 기록을 세웠습니다.
박정석이 세운 15연승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2005년 SK텔레콤 T1 윤종민이 팀플레이 13연승과 개인전 2승으로 15연승 타이 기록으로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있고 10-11 시즌 SK텔레콤 김택용이 위너스리그에서 세 경기 연속 올킬 기록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전만으로 15연승을 달성한 바 있습니다. 두 명의 타이 기록자만 있을 뿐이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박정석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도 초창기에 달성한 기록은 경쟁이 치열해지기 전이라는 한계에 맞닥뜨리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박정석이 세운 15연승은 팀플레이와 개인전에서 모두 활약하면서 이뤄진 탑이기 때문에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팀 동료였던 임재덕, 강민, 홍진호와 함께한 박정석.
◆명가 재건의 초석
스타리그와 MSL 동시 결승 진출, 스타리그 우승, 프로리그 활약 등 스타 플레이어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박정석은 명가로 도약하고자 하는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로부터 러브콜을 받아냈습니다. 한빛 스타즈도 한빛 소프트라는 기업이 이끄는 기업 게임단이었고 명문 프로게임단이었지만 선수들에게 억대 연봉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박정석을 영입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시너지를 감안한 KTF는 파격적인 대우인 '한 장(1억원)'을 제시했고 박정석은 이적을 결심했습니다.
사실 한빛 스타즈를 떠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조건이나 대우를 생각하기 보다 의리를 중시했던 '부산 사나이' 박정석에게 한빛 스타즈는 은혜의 땅이었습니다. 팀플레이밖에 모르던 선수를 발굴해서 성장시키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재균 감독이나 강도경 등 선배를 두고 팀을 옮기는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고 박정석은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재균 감독이 "스타크래프트계가 발전 가능성이 있고 성장하고 있는 업계임을 알려주려면 억대 연봉자가 나와야 한다.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대기업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면 이적하는 것이 맞다"고 이적을 허락하면서 박정석은 마음 편히 팀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KTF에서도 박정석은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당시 KTF는 "명가로 도약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홍진호, 강민 등 수퍼스타 영입에 자본을 투입했죠. 박정석은 이들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했습니다. 팀플레이와 개인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박정석은 개인전을 강민에게 맡기고 팀플레이를 도맡아 달라는 팀의 요구를 받아들여 팀플레이에 혼신을 다했죠.
◇홍진호와 호흡을 맞춰 팀플레이 조를 편성한 박정석.
홍진호와 파트너가 된 박정석은 기본기가 탄탄한 팀플레이 선수로서의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공격 성향이 강한 홍진호의 뒤를 받쳐주는 그림자가 되어 2004년 3라운드부터 2005년 전기리그 정규 시즌 전승 우승의 밑거름이 됐고 이후 KTF가 프로리그 정규 시즌에서 23연승까지 도달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나이
박정석이 KTF로 이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팀을 우승까지 이끌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KTF 매직엔스가 강팀이고 프로리그 정규 시즌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2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지만 결승전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시 KTF의 성적을 보죠. 2004년 3라운드부터 2005년 전기리그를 거쳐 후기리그 중반까지 정규 시즌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2004 시즌 3라운드는 결승전에 올라갔죠. 이 대회에서는 이명근 감독이 이끄는 KOR(훗날 온게임넷 스파키즈가 되죠)에게 최종전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2005 시즌 전기리그에서는 광안리에서 12만 명의 팬 앞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 SK텔레콤 T1에게 1대4로 대패하고 맙니다.
◇2005 시즌 통합 챔피언전에서 패하고 난 뒤 아쉬워하는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 선수단.
복수를 하라고 만들어진 2005 시즌 통합 챔피언전에서 또 다시 SK텔레콤 T1을 결승전에서 만나 2대4로 패합니다. 박정석, 강민, 홍진호, 이병민, 조용호, 김정민, 변길섭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모두 모인 팀이었지만 출전하는 개인리그, 프로리그 모두 준우승만 하면서 1위라는 타이틀을 남에게 내줘 버렸습니다.
박정석도 선수 생활을 하는 내내 2004년과 2005년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몸값은 올랐지만 팀이 원하는 최종 결승전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쥐려고 하면 물처럼 빠져나갔기에 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네요.
군에 가기 전 팀을 우승시키기 위해 나이가 꽉찰 때까지 버티고 버텼던 박정석은 2008년 9월까지 활동하다가 공군 에이스에 입대합니다. 2006 시즌 포스트 시즌 진출을 끝으로 KTF 매직엔스는 결승전은 커녕 포스트 시즌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생각에 박정석은 공군으로 군에 가게 되지요.
◇공군 에이스 유니폼을 입고 결승전을 관전하기 위해 광안리를 찾은 박정석. KT 후배들의 우승 장면을 다른 소속팀의 입장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박정석이 팀을 떠나자마자 곧바로 보란 듯이 정규 시즌 1위, 위너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석이 관객으로 앉아 있던 09-10 시즌 부산 광안리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 후배들로 구성된, 새롭게 개편된 KT 롤스터는 창단 10년만에 단체전 우승을 차지합니다.
박정석이 주전으로 뛰었을 때는 손에 잡지 못했던 우승컵을 후배들이 거머쥐는 모습을 보며 박정석은 '또 다시 기회가 올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 박정석이라는 존재가 KT에 없으니까 더욱 잘한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팀에 복귀했을 때 우승을 하지 못하면 곧바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네요.
◆징크스는 깨지라고 있는 것
실제로 박정석이 KT 롤스터로 복귀하고 나서 열린 10-11 시즌 위너스리그 결승에서 KT는 SK텔레콤에게 1대4로 패하고 맙니다. 박정석의 단체전 준우승 징크스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10-11 시즌 막판 홍진호가 팀을 떠나면서 팀의 최고참이 되어 버린 박정석은 10-11 시즌 SK텔레콤 T1과의 결승전을 앞두고 엄청나게 긴장했습니다. 출전 엔트리에 들지 못했기에 경기에 나서지는 않지만 혹여 자신으로 인해 또 다시 팀이 준우승에 머문다면 선배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10-11 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 트로피를 들고 있는 박정석. 프로리그 우승의 한을 풀었던 시기죠.
그렇지만 KT 후배들은 박정석의 단체전 준우승 저주를 떨쳐내줬습니다. 1대3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영호, 김대엽이 승리했고 에이스 결정전에서 이영호가 도재욱을 제압하면서 박정석이 포함된 KT가 단체전 우승을 차지한 것이지요.
박정석은 이날 우승하면서 "여한이 없다"는 짧은 말을 남겼습니다. KTF로 이적한 2004년 이후, 아니 프로리그 원년 대회인 KTF EVER 프로리그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오던 단체전 준우승 징크스를 털어냈기에 다섯 글자 안에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의 기억들로 점철된 10년의 역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3)편에서 계속
[데일리e스포츠 남윤성 기자 thenam@dailye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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