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기사가 푸른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이 좌르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특히 관리를 잘 받은 듯 우유처럼 뽀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기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곱다.이런 중세 시대에 저런 피부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재희는 잘 안다.특히나 싸움을 생업으로 삼는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딱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는 귀족 자제분 같았다.아가씨들 깨나 울려봤을 것 같은 용모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베인 오만한 눈빛과 행동거지가 은근히 거슬린다.중기병대를 이끌고 오는 남자의 손엔 작은 손거울이 들린 채였다.“뭐야! 땀 때문에 눈 화장이 죄다 지워져 버렸
2019-12-04
23화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에 타다만 폐허들이 자아내는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전쟁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했던가?전쟁도 국력이 없으면 못한다.건장한 청년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무기와 방어구와 식량까지도.모두 다 돈이다.그나마 대륙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는 세 왕국 정도나 되니까 가능했지, 타 왕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10년이 넘도록 전쟁이 지속되면 사람도, 나라도 피폐해진다.이 행성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지구에서의 지난 역사들을 돌이켜봐도 그랬다.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마침내 몰락한 국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 왕국간의 길고 긴 전쟁이
22화 요 며칠간 무기를 굉장히 혹사시켰던 모양이다.‘마침 좋은 기회군.’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기로 했다.“괜찮다면 내가 손봐줘도 될까?”“정말이십니까?”렌은 저도 모르게 화색을 띠었다.조금 전에 재희가 선보였던 대장기술을 보지 못했더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거다.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믿을 수 없는 자에게 선뜻 맡길 순 없을 테니까.칼잡이는 함부로 남에게 무기를 넘겨주지 않는다.그것은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그가 보기에도 16조의 새로운 조장은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것
21화 자신이 만들었던 그 어떤 검들도 저 젊은 청년이 제작 중인 것보다 완벽하지는 못했다.‘저 사람은 대체…….’놀란 건 무어를 뒤따라왔던 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비록 직접 무언가를 제조해 본 적은 없으나, 무기를 다루는 직업인만큼 렌은 수많은 대장장이를 봐 왔다.덕분에 최소한의 안목 정도는 갖추고 있다.개중에는 형편없는 실력을 지닌 엉터리도 있었으며, 절로 감탄을 자아낼 만한 솜씨를 지닌 장인도 존재했다.후자는 단연 곁에 서 있는 무어라는 대장장이였다.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대장장이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장엄한 아우라가 제이라는 조장에게서 느껴졌다.‘……저자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20화 “암만 봐도 직접 뭘 만들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은데…….”무어는 미심쩍은 눈빛이었다.‘그 말이 틀리진 않았지. 이 행성에서 장비를 만들어본 경험은 없었으니까.’재희는 빙긋 웃었다.완전히 초기화된 이 몸으로는 망치 한번 두드려 본 적이 없으니, 무어의 눈썰미는 꽤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뭐, 정 그렇다면 뜻대로 하시오.”무어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강철망치 대장간까지 찾아와서 저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뭘 해 보겠다고 하니, 그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무어가 재희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어디 뭘 얼마나 잘 만드는지 한 번 두
19화 ‘그렇다면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는 뜻인데. 그런데 이 녀석이 귀족이라면 어째서 병사들 틈에 섞여 있는 거지?’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뭐,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브록을 평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희가 가장 주목하는 항목은 다름 아닌 렌의 잠재력이었다.‘A등급이라니.’당연히 B등급인 브록보다 높은 등급이다.렌은 지금까지 이 행성에서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잠재력을 보유한 자였다.A등급을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 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굳이 헤아려 본다면 스무 명쯤 되었을까? 그만큼 대단한 재능이다.“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지?”“아. 아무것도 아니야.”정신을 차리고 상
18화 인벤토리의 큐브가 100개.재희가 만들어 낸 주괴는 33개다.얼핏 보면 100개의 공간은 굉장히 협소해 보이나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동일한 아이템일 경우, 한 개의 큐브 안에 겹칠 수 있으니까.최대 100개까지 아이템을 겹칠 수 있으니, 개수로 따지면 무려 1만 개의 아이템을 저장할 수 있는 셈이다.“휴우.”22개의 니그룸 주괴와 11개의 희귀한 니그룸 주괴가 각각 큐브 하나씩을 차지했다.‘그만 돌아갈까.’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브록, 그 녀석이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아무리 자유가 주어졌다는 해도 명색이 조장인데 조원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날따라 린데일의 번화가는 시끌벅적했다.
17화 두 사람은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그 망할 괴물들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내게 안부도 좀 전해 주게나. 이 무심한 사람 같으니.”“죄송합니다. 제가 그간 소홀했던 모양입니다.”“이런! 자네가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하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나? 농담이었네, 농담. 허허. 자네 앞에선 농도 못 하겠군그래.”영주는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카일처럼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람을 상대로 저렇게 물 흐르듯 대화를 나누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앞장서는 영주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도시의 번화가가 트였다.비록 소도시라고는 해도, 며칠
16화 정 그렇다면 굳이 더 말릴 생각은 없다. 후회는 자신의 몫이 아니니까.“그럼 훈련을 시작해 볼까?”의미심장하게 웃는 재희를 보며, 브록은 영문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음을 느꼈다.“더, 더는 못 하겠습니다!”정확히 10분 뒤, 브록은 자신이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숨이 턱 끝까지 찼다.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벌써 지쳤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악마다! 저 인간은 악마가 틀림없어!’나무 둥치에 한가로이 앉은 재희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는 브록이었다.“어서 일어나, 지금 쉬어버리면 지금까지 했던
15화 액티브 스킬은 구급법과 마나 호흡법이다.평소 활은 애용하지 않지만, 보너스 스텟을 위해 일단은 스킬 획득만 해 두었다.아머 마스터리는 희망하는 종류의 갑옷을 걸친 상태에서 공격을 받으면 습득할 수 있어, 그 난이도가 쉬운 편이다.지금은 가죽 갑옷밖에는 없지만, 나중에 여유가 되면 천이라던가 철제 갑옷 등의 마스터리도 따로 얻어 둘 예정이었다.‘유능한 조장이라.’힘과 민첩, 체력과 감각. 무려 네 가지 능력치를 각각 5씩 상승시켜 주는 칭호를 얻었다.초반용으로는 꽤 괜찮은 타이틀이다.지금껏 꽤 많은 하울링을 처리하면서 상당한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거주했던 행성들을 모두 통틀어 봐도 손에
14화 원래 이런 보고는 조장의 몫이었지만, 조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그가 대신 대답했다.“……그렇군. 좋은 녀석이었는데.”카일은 어두운 낯빛을 했다.부대에 애정이 남다른 그로선 병사들의 죽음이 안타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특히 한켈은 무려 7년간 클로버 보병대에 소속되었던 고참병 중 한 명이었다.싸움에 능숙한 고참병의 죽음은 특히나 타격이 클 수밖에. 냉정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전쟁터에서는 동료의 죽음에 일일이 슬퍼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하루하루 슬픔에 젖어 살았다간 폐허처럼 마음이 피폐해질 테니까.“조장을 잃은 조는 16조가 유일하군. 본래 조장의 임명권한은 내게 있으나, 먼저 그대들의 의견을 묻
13화 이 괴상한 능력을 갖춘 인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은 고심에 사로잡힌 듯하다.‘놈에게 당할 염려는 없고…….’비전 아이를 기본으로 적당히 스톤 스킨을 활용한다면 러너가 재희에게 상해를 가할 방법은 없었다.‘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건데.’오러를 좀 더 극대화한 검으로 베어 버린다면 어찌어찌 가능할 듯도 하다.실제로 이 세계의 기사들도 그런 방법을 애용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 카일도 오러를 입혔었으니까.‘문제는 내가 보유한 마나가 놈을 절단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는 거지.’마나를 축적하기 시작한 게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였다.현재의 마나
12화 2등급까지는 오러 유저가 아니더라도 잘 협력만 하면 어찌어찌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이다.하지만 3등급부터는 차원이 달라진다.극도로 경화된 놈들의 피부는 가히 중갑 수준이다.보통의 쇠붙이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 오러 유저가 아닌 이상 놈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클로버 보병대에서 오러 유저는 단 세 명.카일과 라미로. 그리고 멘델뿐이다. 하급 부관 멘델에게선 뭔가를 기대하긴 어렵다.라미로조차도 전투에 능한 부관은 아니다.개인 전투 분야에서는 간신히 턱걸이로 기사 시험을 통과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결국, 나뿐인가.’그나마 러너와 맞설 만한 자는 카일 자신뿐이다.러너를 포착한 그는
11화 부대장이 신임하는 자이긴 하나, 재희는 엄연히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그런 녀석이 멋대로 전열을 이탈한 것도 모자라, 부대장의 앞길을 가로막아 버리니 건방지다고 느낄 수밖에.“괜찮다.”카일이 손을 들어 멘델을 제지했다.“무슨 일이지?”‘늦지 않아 다행이군.’지면 어딘가를 응시하는 재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테니까.“전방에 하울링들이 있습니다.”“뭐?”동굴은 무척이나 넓었다.원래 동굴이라면 무척이나 어두컴컴했을 테지만, 야생화들 덕분에 횃불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환했다.카일을 비롯한 부관들은 하나같이 전방을 응시했다.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
10화 ‘……다들 살아남았을까?’ 아버지, 어머니. 하나뿐인 동생. 친구들까지.냉정하게 따지면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그 밀폐된 공간에서 수천 마리의 기생충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려왔으니까. 그럼에도 만약에, 혹시나 그들이 운 좋게 살아남진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떨쳐낼 순 없었다.적어도 직접 그들의 최후를 목격하진 못했으니까.‘설령 다들 살아남지 못했다고 해도 상관없어.’차원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소환물.차원문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만 알게 된다면 재앙이 벌어지기 전의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반드시, 반드시 돌아가 주마.’클로버 보병대의 행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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